카테고리 없음

가수 한상일 나이 프로필 최근영상 기타작품 고향

457gh 2022. 11. 7. 11:00

- 가요무대 트로트 가수 한상일 프로필 경력

본명
한제상

나이 출생
1942
고향 출생지
북한

데뷔
1967년 노래 '내 마음의 왈츠'

음악은 내 평생의 동반자.. 엔도르핀 폭풍처럼 쏟아지는 느낌"
- 2011. 3. 18

노래의 생명력은 참 끈질기다. 수십년, 아니 수백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그런 노래가 바로 '명곡'이다. 가수 한상일(70)씨는 세월이 흘러도 잊어지지 않는 명곡을 가진 '행복한 가수'다."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우리가 울었던 지난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가 미워한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 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50대 이상 중장년층에게 가요 '웨딩드레스'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한상일씨다. 달콤한 듯하면서도 애잔한 멜로디와 가사, 여기에 진한 크림처럼 부드럽고 묵직한 한씨의 음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던 '웨딩드레스'가 세상에 태어난 지 올해로 꼭 41년이 된답니다.


영원한 '웨딩드레스'의 가수 한상일씨를 지난 2월23일 제주도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요즘도 가끔 KBS '가요무대'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연하며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음악이 없는 내 인생과 일상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주시 외곽의 전원주택단지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최근 방송과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됐다. 바다가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배기 위 넓은 대지에 세워진 방 10개짜리 집이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시선을 모은 것. 지난 2006년 여름 분당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이사왔다는 그는 전원생활으로 얻은 즐거움과 제주 사랑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은퇴생활로 꿈꿨던 몇 가지가 있었어요. 걸어서 5~10분쯤 떨어진 곳에 포구가 있는 바닷가 양지바른 언덕 위에 집을 짓고 텃밭 가꾸고 강아지 키우면서 살고 싶었지요. 거제, 통영, 남해 등 여러 곳을 다니며 둘러보다가 2000년대 초쯤 제주에 왔는데, '내가 왜 제주를 잊고 있었지'란 느낌이 들더라고요. 제주는 20여년 전쯤 이곳의 한 호텔에 임원으로 근무하면서 몇년간 살기도 했던 인연이 있는 곳이거든요.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한라산이 보이는 집인데 날씨가 좋은 날 옥상에 올라가면 멀리 목포 바다와 산까지 보인다니까요."라고 전했답니다.

집 안팎 구석구석에는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당초 1층 베란다였던 곳은 흙벽을 세우고 문을 달아서 독특한 분위기의 응접실로 탈바꿈했다. 한쪽에 자리잡은 흰색 그랜드 피아노와 대형 AV(Audio Visual)시스템이 건축가이자 가수 출신인 집주인의 개성과 안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2층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민 침실과 서재가 있고, 3층의 넓은 유리창으로는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집주인 한씨의 말에 따르면, 쾌청한 밤에는 바다 위에 떠있는 고기잡이 배들의 반짝이는 불빛이 한 폭의 그림같습니다.

지하에는 황토찜질방도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황토와 마른 풀 향기가 향긋하다. 마당에는 금붕어와 잉어가 헤엄치는 연못과 텃밭이 자리잡고 있다. 한때 개 9마리와 오리, 닭 등 동물 49마리가 이곳에서 뛰놀았지만, 여기저기로 떠나보내고 지금은 백구 한 마리와 닭, 오리 서너마리가 '식구'로 지내고 있다. 봄이 되면서 그는 텃밭에서 다시 채소를 키우고 꽃나무를 가꿀 생각에 마음이 분주하고 즐겁답니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행동반경이 줄어들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잖아요. 전원주택은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은퇴생활에 좋은 것 같아요. 저만 해도 실내에서는 골프퍼팅 연습과 헬스, 음악과 영상을 즐기고 마당에서는 직접 텃밭을 가꾸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거든요. 제주는 대도시와 달리 슬로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가끔 서울에 가긴 하는데 답답하기만 해서 빨리 집에 오고 싶어져요. 육지 뉴스가 먼나라 소식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죠. 서울 생활을 버리고 이곳으로 온 것에 100% 만족하고 있어요."

그가 건강을 지키는 또 한 가지 비결은 꾸준한 운동. 48세 때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았던 그는 6개월 만에 싱글 수준이 됐고, 지금도 아침 점심 저녁 150개씩 매일 450개의 공을 치며 퍼팅연습을 한 덕분에 웬만한 골프광들도 그의 실력에 깜짝 놀라곤 한다고. 육지에 비해 훨씬 저렴한 제주의 골프장 사용료 덕분에 한때는 1주일에 5회나 골프를 친 적도 있었다며 웃었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쾌적하고, 널찍한 집에서 한씨는 혼자 지낸다. 이혼에 대해 그는 "서로 잘 안 맞았다"면서 "둘이서 괴로운 것보다는 혼자 외로운 것을 택했다"고만 말했다. "왕래가 끊겨버린 아들과 손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그렇고, 가끔은 외로울 때도 있지만 감수할 것은 감수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낸다"고도 했다.

1941년 개성에서 태어난 한상일씨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노래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었다. 서울대 건축과 재학 중에도 음악활동을 했지만, 노래를 직업으로 택할 계획은 없었다고. 졸업 후 설계사무소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노란샤쓰의 사나이',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작곡가 손석우씨와 연결돼 그에게서 노래를 사사한 한씨는, 본명 한제상 대신 한상일이란 예명까지 받고 미 8군 유섬클럽 전속, KBS 전속 가수가 돼 아예 직업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변화였답니다.

두 번째 변화는 바로 히트곡 '웨딩드레스'. 트로트 계열의 곡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요계에서 스탠더드팝 풍의 고급스러운 이 노래는 서울대 출신 가수란 화제성까지 더해져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이른바 인기가수 대열에 들어섰지만, 연예계의 생리가 한씨에겐 그리 어울리지 않았던 듯하다.

또 다른 히트곡 '애모의 노래' 외에 별다른 인기곡이 없는 이유에 대해, "다작 속에서 히트곡도 나오는 법인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겠느냐"고 그는 되물었습니다.

"한마디로 대중적이지 못했지요. 사실 제겐 미국의 스탠더드팝이 잘 맞았어요. 미 8군 무대에 설 때 300여곡을 섭렵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도 국내가요보다는 미국 팝송을 더 즐겨듣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대중적이진 않아도 꽤 잘나가던 가수생활은 13년 만에 끝났다. 한씨의 나이 37세 때이다. 가수로서 한계를 느낀 그는 마흔을 앞둔 나이에 전공인 건설분야로 유턴했다.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 취직해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투입되기도 했던 그는 "15살쯤 어린 동료들과 일하며 늦은 직장생활을 했지만 잘 어울렸고, 지금도 서로 오고가면서 지낸다"고 말했다. "가끔 사내행사에서 마이크를 잡기도 했지만 가수시절을 그리워하거나 돌아보지는 않았다"고.


무대를 다시 찾은 것은 은퇴한 이후부터이다. TV 프로그램에 가끔씩 출연하기도 하고, 2005년에는 '손석우 음악생활 55주년 헌정음반'을 통해 신곡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를 발표했답니다.

2009년에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공연을 열기도 했다. "산책하면서 복식호흡 연습을 하는 등 꾸준히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목소리가 늙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음악은 제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음악과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인간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위로해 주니까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듣다보면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마치 폭풍처럼 쏟아지는 느낌이에요. 마음의 때가 다 벗겨지는 것 같지요."라고 전했답니다.

한씨의 꿈은 사랑에 관한 음악과 이야기를 모은 CD와 책을 펴내고 콘서트를 여는 것. 제목도 정해놨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소녀들에게(To All the Girls I've Loved Before)'. '소녀'가 아니라 '소녀들'이냐고 확인했더니, 그는 "윌리 넬슨이 부르고 핼 데이비드가 작사한 유명한 노래 제목"이라면서 웃었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내 문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던, 내가 사랑했던 모든 소녀들에게 노래를 바칩니다… 내가 애무했던 모든 소녀들에게, 최고를 경험했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하렵니다."

일흔의 나이에도 낭만과 열정이 철철 넘쳐흐르는 그에게 딱 어울리는 노래인 듯 싶답니다.

웨딩드레스’ ‘애모의 노래’의 로맨티스트, 가수 한상일의 삶과 노래
- 2018년 06월 05일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 한상일씨가 1970년 2월에 발표한 노래 ‘웨딩드레스’다. 이 노래는 정인엽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먼데서 온 여자(이희우 극본, 정인엽 감독, 신성일 윤정희 김정훈 김창숙 주연)’의 주제가다. 당시 발표되자마자  ‘하와이안 웨딩 송’과 더불어 결혼축가의 대명사로 자리했답니다.

흔히들 ‘노래엔 임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노래는 '신사의 멋'이 물씬 풍기는 한상일씨의 분위기에 제 격이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 ‘웨딩드레스’는 처음 작곡가 길옥윤씨와 정풍송씨에 의해 각각 만들어진 노래다. 말하자면 같은 노랫말에 멜로디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노래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 공교롭게도 두 작곡가의 각기 다른 노래는 모두 한상일씨에 의해 취입되었다.

“1주일 정도의 차이로 같은 가사의 노래를 각각 다른 멜로디로 연습해야 했어요. 그리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음반이 나왔지요. 때문에 방송국 측에서는 신청엽서를 받으면 어느 곡을 틀어야 할지 몰라 애먹었고 저 역시 무대에서 ‘웨딩드레스’를 요청받으면 무대에 따라 두 곡을 번갈아 부르기도 했지요.” 한상일씨의 회고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풍송 곡의 ‘웨딩드레스’는 발표 당시 영화 제목을 따서 ‘먼데서 온 여자‘라는 별도의 부제를 달고 출시되었답니다.

가수 한상일씨는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곡을 발표하지 않았다. 가수로서의 활동 기간도 길지 않다. 1965년 손석우 작곡의 ‘추억의 아카시아’, ‘나의 사랑 기타’를 발표하며 데뷔한 그는 70년대 말 가요계를 떠났다. 자신의 전공을 찾아 건설 분야의 직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30 여 년 뒤인 2005년 '작곡가 손석우 노래 55주년 헌정음반'을 통해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 ‘그 이름’ 등을 발표하며 돌아왔다. 오랜 동안 가요계를 떠나있었음에도 가창력은 여전했답니다.

- 유년시절,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우등생이자 재주꾼으로 통해

1941년 1월 18일, 이북 땅 개성에서 부친 한효경(韓孝慶)과 모친 진은주(陣銀珠) 사이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 개성 만월초등학교 4학년 때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으로 피난 내려온다.

인천 서림초등학교, 인천중힉교를 거쳐 서울 경동고를 졸업했다. 중2 때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혼자가 되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인천의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신문배달 등으로 고학을 해야 했다. 이후 서울 경동고등학교 진학한 그의 꿈은 의사였지만 진로를 바꿔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한다.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자 노래 잘하는 재주꾼으로 통했던 그는 특히 대학시절, 친구들과 4중창단을 결성해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특히 마리오 란자, 앤디 윌리암스, 후랭크 시나트라 등에 심취했답니다.

1965년 대학 졸업 후 은사가 설립한 ‘김희춘 설계사무소’에 입사, 설계기사로 일을 시작하지만 결국 노래를 부르기 위해 미8군 장교클럽인 ‘유썸클럽(Yusumclub)’에서 전속가수, 즉 하우스 싱어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주위의 도움으로 누구보다 먼저 ‘팝송악보’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스탠더드 팝을 무려 3백여 곡 정도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레파토리를 갖추고 있었답니다.

또한 작곡가 손석우 선생을 찾아가 신곡들을 받아 취입한다. 이중 ‘가거라 저 멀리(1966년)’가 히트하면서 손석우 선생의 권유로 KBS-TV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해 칸초네 ‘Carissimo Pinocchio(피노키오의 편지)’를 불러 1기생으로 발탁된다. 1966년도의 일이다.

본명은 한제상(韓濟祥). 그러나 손석우 선생은 그에게 한상일(韓常一)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글자 그대로 '늘 어디서든 일등이 되어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면테스트까지 거친 TV 전속가수였기 때문에 무대에서 노래는 물론 율동까지 소화해내야 했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 골수염으로 인해 오른쪽 발목을 잘라낼 위기까지 넘겼던 터라 다리가 불편해 무대에서의 율동을 소화해내기가 어려웠어요.”라고 전했습니다.

때문에 방송국 측 입장에서는 한편 난감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생각된다는 그는 결국 무대 대신 라디오 진행자로 '밤으로의 초대'나 '장미의 화원' 같은 음악프로그램에 주력했다.

또 하나의 히트곡, 뮤지컬 주제가  ‘애모의 노래’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꿈같은 구름타고/천사가 미소를 짓는 지평선을 나르네/구만리 사랑 길을 찾아 헤매는/그대는 아는가 나의 넋을/나는 짝 잃은 원앙새 나는 슬픔에 잠긴다.’ -‘애모의 노래(황유철 작사, 안길웅 작곡, 한상일 노래)’

‘웨딩드레스’와 함께 가수 한상일씨의 또 다른 히트넘버 ‘애모의 노래’는 1969년 당시 뮤지컬 ‘카니발의 수첩’의 주제가다. 뮤지컬 공연 당시에는 남녀 듀엣에 의해 불려졌다. 이 세미 클래식조의 노래는 밝고 힘 있는 한상일씨 목소리가 최적이라고 판단, 작곡가 안길웅씨는 그에게 취입을 권유했습니다.

동갑내기인 작곡가 안길웅씨와는 이 무렵 술자리도 자주 가질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였다. 안길웅씨 또한 예그린 악단의 전속가수 출신으로 노래실력이 출중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함께 발표한 ‘오 천사여’도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답니다.

계속해서 그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삽입곡인 ‘에델바이스(1967년)’, 레이 피터슨의 ‘Tell Laura I Love Her’를 번안한 ‘영아는 내 사랑(1969년)’, 그리고 ‘지난여름의 왈츠(1971년)’ 등 번안곡을 발표한다.  또한 이 무렵 성바오로 여자수도회가 출반한 성가곡집 ‘세상에 외치고 싶어’ 등도 취입했다. 그의 발성법은 이미 ‘단전 호흡하듯 노래하는 탄탄한 가창력’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정평이 나있었답니다.

이 무렵 그는 문화공보부 제정 방송대상 남자가수상, 서울신문사 제정 서울문화대상 남자가수상, mbc 10가수상 등을 휩쓸었다.

틈틈이 드라마주제가도 취입했다. 드라마 ‘후암동 찻집(차범석 작사, 김광수 작곡, 1967년)’, ‘광야의 사나이(곽일로 작사, 황문평 작곡, 1969년)’, 그리고 ‘머나먼 휴일(황문평 작곡, 1968년)’ 등이랍니다.

특히 이 ‘머나먼 휴일’은 1954년 가수 현인이 ‘낙엽’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멜로디에 노랫말을 바꿔 드라마주제가로 사용된 노래다. 이 노래는 또한 ‘애상(1966년, 이미자)’이란 제목으로도 발표되었다.

지난 2005년 11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그동안 취입한 노래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어보고자, 그가 발표한 노래 곡목을 뽑아 건네주었다. 리스트를 훑어보던 그의 표정이 순간 당황스런 빛으로 변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그렇게 많은 노래를 취입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답니다.


의외로 많은 가수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자신의 취입 곡 중 상당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사는 물론 멜로디조차 대부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불과 몇 번의 연습 끝에 단 한 차례 취입한 곡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음반을 취입해놓고 제대로 들어볼 시간도 없이 바빴다고 회고한답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노래와 연기 선보여...

TV 전속가수로 출발했듯 엔터테이너 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이내 ‘예그린악단’으로부터 뮤지컬 ‘대춘향전’의 출연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스스로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무대에서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김희조씨가 음악을 맡은 이 뮤지컬 공연에 직접 나서지 않는 대신 가수 패티김과 함께 ‘이도령’역과 ‘춘향’역을 각각 맡아 음반만을 취입했다. ‘예그린 뮤지칼 3집-대춘향전’ 음반에 ‘내일을 기다려’는 패티김과, ‘꽃 찾는 나비’는 예그린의 나영수(전 국립합창단 단장 겸 지휘자)와, 그리고 ‘설레는 이 가슴’은 독창으로 각각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기 TV 드라마 MBC ‘수사반장’ 등에도 출연했다. 탤런트 고은아씨와 사랑행각을 벌이며 위장 결혼해 파티장에서의 살인 협박을 하는 범인의 시골친구인 가수로 출연했다고 기억한다.

이 때 그는 건축과 출신답게 치밀한 성격을 드러내 담당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가령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로 대사 수정 요구를 하는 것은 물론 드라마 상황에 비해 세트장이 너무 작다고 지적, 세트장을 모두 다시 제작하게 만든 당시 에피소드들이 그 것. 이어 에디뜨 삐아프의 삶과 사랑을 그린 뮤지컬 ‘빠담 빠담 빠담’에서 에디뜨 삐아프의 연인, 이브 몽땅 역을 맡아 가수 윤복희씨와 호흡을 맞췄답니다.

제2의 인생을 찾아 가수 생활 접고 건설 분야로 유턴

노래는 물론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에게 주위에서는 그에게 다양한 활동을 요구했지만 정작 그는 연예인으로써 집안의 내조를 전혀 받지 못했다.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출신이라는 ‘최고학부’의 꼬리표는 늘 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해 수시로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집안의 반대로 연예활동을 접게 된 그는 1978년, 모든 연예 활동을 접고 전공을 찾아 건설 분야로 U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이때 그의 나이 어느덧 37세랍니다.

현대건설 입사 초기엔 그동안 연예인이기에 받아왔던 스포트라이트가 눈부셔 되레 짙은 그늘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미국 DMJM으로 연수를 떠난다. 이어 사우디 현대건설 현장에 외국인 감독관으로 파견, 2년 6개월 정도 근무한 뒤 현대종합목재에서 가구 판매 영업을 익혔으며 86년에는 아예 미주종합목재라는 가구공장까지 차린다.  ‘파라다이스 투자개발(건설회사)’에 근무할 당시 제주 서귀포 허니문하우스 호텔 건설에도 관여했다. 그는 가구회사, 투자개발회사 등을 거쳐  98년 퇴임할 때까지 20여 년 간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 있었다빈다.

그 기간 동안 공식 가수활동은 접었지만 CF를 통해서는 대중들과 이따금씩 만났다. 포도주나 커피광고, 종합 비타민, 패션양복 모델 등이 그 것으로 귀족적 신사 이미지로 각인된 그의  캐릭터는 이 때문에 더욱 굳혀진 것이기도 하다.

황혼 이혼과 함께 시작된 전원생활

98년에 퇴직한 그는 뒤늦게 황혼이혼을 했다. 2007년 말의 일이다. 이혼과 함께 그는 제주도 조천의 전원주택을 사들여 전원생활을 시작한다. 필자가 이 제주의 전원주택을 찾았던 것은 지난 2010년이랍니다.

대지 3백 평에 건평 120평.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집, 뒤뜰의 오리, 기러기, 토종닭과 리트리비 강아지 두 마리, 인기척만 나도 알아채고 몰려드는 잉어 40 여 마리가 헤엄치는 연못, 뒤뜰의 오리, 기러기, 토종닭과 리트리비 강아지 두 마리... 한마디로 그림 같은 집이었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10분 내로 포구에 가서 물고기를 고를 수 있는 바다와 산이 어울리는 이 제주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곳이죠. 실제로 이곳에 온 뒤 흰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당시 그의 말이었답니다.

3층 구조에 방이 자그마치 9개다. 혼자 사는 집치고는 너무 크다. 너무 넓어서 관리가 쉽지 않겠다고 말하자 ‘할 일이 많은 것이 오히려 전원생활의 매력’이라고 강조하던 말이 떠오른다. 1층에는 황토방, 3층에는 앞뒤에 같은 크기의 창문이 있어 그 창문을 통해 바람이 지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풍욕(風浴)방도 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이 ‘바람골’이었답니다.

뒤뜰에는 직접 가꾼 텃밭도 있어 고추, 깻잎, 오이, 호박, 토마토들은 싱싱한 채로 식탁에 오른다. 동네사람들과 나눠먹는 것도 많아 정도 함께 가꿀 수 있다는 제주에서의 생활은 이전 육지에 비해 생활비가 3분의 1 수준이라 했다.

때문에 정작 외로워 할 틈조차 없다는 그는 이혼에 관해서도 담담하게 입장을 밝혔다. ‘가치관 차이였죠. 그래서 둘이 있어 괴로운 것보다 혼자 있는 외로움을 택한 것이 결국 이혼’이라며 만남과 헤어짐 자체를 순리로 받아들인다는 심사를 담담히 토로한다.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뒤늦은 이혼을 선택할 때까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이 많았다고 토로한다. 노래와 전공 사이의 괴리도 그중 하나다. 물론 혼자 산다는 것에 따르는 어려움이 많지만 전원생활은 오랫동안 그가 꿈꿔온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다.

“제주에 온 뒤 많은 것을 되찾았어요. 무엇보다 음악과 자연이 늘 곁에서 내 편이 되어준다고 여기니 그렇게 평온해질 수 없더군요. 시간과 마음을 비워놓으니 비로소 잠재된 꿈이 눈을 뜨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꿈을 자각해 다시 무대를 찾은 그는 당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매일 두 차례씩의 라이브공연을 하고 있었답니다.

- 지성, 낭만, 건강함의 대명사, 가수 한상일의 요즘 생활은?

2014년, 제주생활을 청산하고 현재 경기도 분당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는 76세의 로맨티스트, 가수 한상일씨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필자 또한 로맨티스트가 되어가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의 건강관리는 철저하다. 아침마다 조깅을 하고 복식호흡을 하고 발성연습을 한다. 집 근처에 위치한 성마리아 성당에서 매년 열리는 성당음악회에도 자주 선답니다.

마음공부를 위해 불교방송 많이 듣는다는 그의 철학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마음이 있는 곳에 인생이 있고 행복이 있다며 늘 마음을 가다듬는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 걱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고집부리지 않고 마음 비우면 건강은 절로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생활철학이다.

자연과 음악을 가까이 하다 보니 건강이 늘 곁에 있다. 현재 분당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틈틈이 음악에세이 등을 집필하고 있는 가수 한상일씨. 더불어 멋지게 펼쳐질 그의 ‘제3의 인생’을 기대해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