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히든싱어7'에서는 삶을 노래하고 사람들을 위로했던 '사랑의 가객' 김현식이 마지막 원조가수로 시즌 대미를 장식하며, 고 김광석, 고 신해철 편에 이어 또 하나의 기적 같은 무대를 완성했다.
어느덧 32주기를 맞은 김현식은 10년의 짧은 가수 활동에도 '내 사랑 내 곁에',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배출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이미 아이돌급 인기를 자랑했던 김현식은 TV 출연 없이 2집 '사랑했어요'가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형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발전시킨 전설적인 가수 김현식은 1990년 11월 1일, 만 32세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현식과 함께 활동한 오랜 친구,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천둥호랑이' 권인하부터 후배 가수 백지영, 린, 박창근, 이솔로몬, 쏠, 라포엠, 시네마, 퀸즈아이, 방송인 조나단, 송해나 등이 연예인 판정단에 자리했다.
특히 밴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일렉 기타를 연주했던 김종진은 날씨가 쌀쌀해질 때쯤이면 늘 생각나는 김현식의 목소리를 추억했다. 이어 김현식과 절친한 가수 권인하는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기 5일 전, 힘든 상황에도 녹음실로 향하던 때를 털어놓으며 김현식의 짧은 생애에 아쉬움을 전했답니다.
이날 원조가수 없이 진행된 김현식 편은 기존 진행방식과 동일하게 규칙을 적용한다. 더불어 80년대 음악은 반주 음악, 목소리가 따로 분리된 멀티 트랙 파일이 없어 진행이 불가했지만, '히든싱어' 제작진은 인공지능 프로세싱을 기반으로 한 음원 분리 기술을 제휴 받아 김현식의 목소리만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김현식은 1990년 7월 1일 마지막 콘서트 때 목소리로 소감을 대신 전하며 먹먹함을 안겼다. 더불어 권인하부터 시네마, 라포엠, 쏠, 박창근, 이솔로몬 등 많은 후배 가수들이 김현식의 명곡 메들리를 선사하며 감동을 안겼답니다.
1라운드는 '추억 만들기', 2라운드는 '비처럼 음악처럼', 3라운드는 '사랑 사랑 사랑'으로 진행된 가운데 모창능력자 '1987 김현식' 방원식, '골목길 김현식' 김정수, '격파왕 김현식' 양경진이 차례로 탈락했다.
'내 사랑 내 곁에'로 진행된 마지막 라운드에 김현식과 '초순수 김현식' 김종한, '신촌블루스 추천 김현식' 김귀오가 올랐다. 절친라인 김종진, 권인하도 혼란스럽게 했던 김현식 편의 최종 우승자는 김현식이 영광을 안았다. 2위에 김종한, 3위에 김귀오가 호명됐습니다.
故유재하-김현식, 오늘(1일) 33주기·30주기..같은 날에 떠난 '천재 뮤지션' - 2020. 11. 1
음악 팬들이라면 11월 첫날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두 이름이 있다. 가수 유재하, 김현식이 각각 33주기, 30주기를 맞았다. 유재하는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5세였다. 김현식은 3년 후인 19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눈을 감았다. 향년 32세였다.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여전히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답니다.
유재하는 단 한 장의 앨범으로 한국 가요계에 족적을 남긴 가수다.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키보드를 맡았던 그는 1987년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했다.
'그대 내 품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리워진 길', '우울한 편지', '지난날' 등 직접 작사, 작곡한 9곡이 수록된 앨범을 발표하고 주목받았지만, 음반 출시 3개월 만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사후 그의 음악과 노랫말이 주목받으며 '천재 싱어송라이터'로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김현식은 1980년 1집 '봄여름가을겨울'로 데뷔, 1984년 2집 '사랑했어요'로 사랑받았다. 백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1986년 3집을 발표하고 '비처럼 음악처럼'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1987년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는 등 굴곡진 삶을 살기도 했다. 1989년 신촌블루스 2집에 실린 '골목길', 같은 해 강인원, 권인하와 함께 부른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큰 사랑을 받으며 전성기를 이어갔답니다.
19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991년 유작 앨범인 6집에 발표된 '내 사랑 내 곁에'가 큰 사랑을 받았다.
김현식의 30주기를 맞이하는 올해 리메이크 앨범, 특집 방송 등이 이어진다. 고인의 30주기를 기리기 위한 리메이크 앨범 '추억 만들기'는 11월 발표를 앞두고 있다. 가요계 히트 메이커 이단옆차기를 비롯해 다수의 작곡팀과 10여 팀이 넘는 실력파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에 참여해 시대를 초월하는 김현식의 명곡을 재해석한다. 엠넷은 김현식의 음악과 삶을 재조명하는 특집 방송을 준비 중이다. 하하가 MC를 맡아 봄여름가을겨울 김종진, 포토그래퍼 김중만 등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1990년 11월 1일은 음악, 그리고 외로움에 절어 살던 가수 김현식이 세상을 뜬 날이다. 어느새 그가 서른두 살의 나이에 간경화로 죽은 지 15년이 흘렀다. 그냥 '가수'로 부르기엔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족적이 너무도 깊고 컸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를 '거목'이라고 부른다. 갈라지고 탁한, 악을 쓰며 토해내는 듯한 특유의 음색으로 부른 그의 노래는 듣는 이들의 심장에 그대로 절절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답니다.
그 거친 목소리의 아름다움
그의 삶, 음악에서 떼려야 뗄 수 없었던 원초적 고독과 슬픔, 분노가 청취자에 고스란히 이식되는 순간들이었다. 고(故) 김현식의 15주기를 기려 지난 10월 29일 연세대 대강당에서는 추모공연이 열렸다. 권인하, 우순실 등 동료가수들이 그를 위해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고 어느덧 중년이 된 팬들이 그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었습니다.
영화감독 육상효씨에 따르면 육씨가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 시절에 만난 김현식은 주벽과 기벽이 심했는데 늘 "세상의 소외계층을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계급적 소외계층보다 넓은 의미로 소외계층이라는 말을 생각한다"며 자신은 실연당한 사람들도 세상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소외계층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랍니다.
김현식은 1958년 1월 7일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가 기타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보성중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정릉의 큰집에서 사촌형들과 함께 살았는데 홍익대 내 그룹사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고 있었던 사촌형 양국정씨가 기타 치는 법을 가르쳐줬다. 음악에 빠지면서 모범생이던 김현식의 성적은 급강하했다. 경기고에 낙방한 후 후기 명지고에 들어가 밴드부 활동을 하다가 자퇴하는 수순을 밟았답니다.
곧바로 종로에 있던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는데 차츰 학원에 나가는 일보다는 종로통의 깡패들과 어울리는 날이 많았다. 노래가 하고 싶었던 그는 업소의 오디션을 통과해 종로의 '벌판', 명동의 '쉘브로' '썸씽' 등에서 노래를 불렀고 당대 스타 가수 이장희의 친동생인 이승희와 듀엣을 이뤄 당시 송창식 등 스타들이 드나들던 최고의 국도호텔 무대에도 섰습니다.
이승희와 헤어진 뒤에는 '신촌블루스'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김동환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김동환은 "가수는 선천적 목청을 타고난 가수와 후천적 발성 노력에 의해 자기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가수 두 종류가 있는데 김현식은 전자에 속할 것"이라며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채 스물도 안 됐는데 웬 양아치 같은 녀석이 노래는 기막히게 잘했다"고 회고했다고 한답니다.
김현식의 첫 앨범 발매 시도는 1978년, 당시 사업가, 음악기획자로도 한국 가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장희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녹음이 거의 끝나고 마스터테이프가 나올 즈음 이장희가 사업부도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무산됐다. 게다가 그 당시 한국 가요계에 만연한 대마초 사건으로 김현식도 8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현식의 첫 독집앨범은 이장희가 착수한 때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난 1980년 서라벌레코드사를 통해서 나왔다.
앨범 출시 후 색소폰으로 유명한 정성조가 이끄는 '메신저스'라는 그룹에서 활동했으며 이 즈음 부인 김경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이듬해에는 그가 '나의 분신'이라며 끔찍이 사랑한 아들 완제가 태어났다. 이 시기 '메신저스'와 결별하고 '검은 나비'라는 그룹의 리드싱어를 맡았고 '주저하지 말아요'라는 곡을 만들어 동료가수 방미에게 주었답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음반만을 전문적으로 기획 제작하던 '동아기획'이 그를 스카웃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어 '어둠 그 별빛' '바람인 줄 알았는데' '당신의 모습' 등으로 구성된 2집 앨범 '사랑했어요'가 출반돼 폭발적 반응을 얻었으나 같은 동아기획에서 곧바로 나온 '들국화' 앨범이 더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김현식의 2집은 주춤했다.
2집 후에 김현식은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을 조직했고 그 멤버는 김종진, 전태관, 박성식, 그리고 역시 요절한 가수 유재하였다. 육상효씨를 비롯한 김현식의 주변 사람들은 "이 시기 그의 주벽과 자유분방함을 견디지 못한 아내와 별거하면서 김현식은 가장 불운한 시간들을 보냈다"며 "술만 취하면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면서 아들 완제를 보러 갔다"고 전했다.
- 정말로 '내사랑 내곁에' 세상 뜬 후 히트
김현식의 3집 앨범은 '봄여름가을겨울' 시절 나왔다. '빗속의 연가' '슬퍼하지 말아요' '그대와 단둘이서' 등이 담겼고 유재하는 자신이 만든 '가리워진 길'을 선물했다. 3집 앨범에는 김현식의 최대 히트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머릿곡으로 실려 있다. 3집 앨범은 불티나게 팔렸지만 김현식은 대중에게 '얼굴 없는 가수'였다. 좀처럼 TV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TV 녹화를 앞두고 연출자의 이래라 저래라 하는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방송을 팽개치고 가버렸다는 김현식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라이브 콘서트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가수였습니다.
1987년 가을 그는 다시 대마초 상용혐의로 구속됐고 그로부터 5개월 만인 1988년 2월 63빌딩에서 삭발한 채 재기콘서트를 가졌다. 하지만 계속되는 폭음으로 그의 몸은 날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갔다. 그런 와중에 '비오는 어느 저녁'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사랑할 수 없어'와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이 수록된 4집 앨범을 냈다. 1988년 말에는 음반판매량이 가장 큰 시상의 기준이 되는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폭음과 과로로 그의 육체는 허물어지고 목소리는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다.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나온 5집 앨범은 그래서 어느 앨범보다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온다. 공전의 히트곡 '내사랑 내곁에' 등이 실린 6집 앨범은 그가 세상을 뜬 후 햇빛을 보았답니다.
음악평론가 강헌씨는 "1980년대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김현식이 지니는 의미의 핵심은 서구 대중음악의 수용이 한국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총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김현식의 음악은 포크와 이지 리스닝 팝, 록과 블루스, 퓨전에 이르는 서구 대중음악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는 분석이랍니다.
강씨는 또 "언더그라운드의 상대적 자유로움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만의 독특한 음색을 분만하게 했고 이 음색에 이르러 그의 개성은 비로소 완성됐다"며 "전인권의 그것과도 다른 그의 음색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대중음악의 왕관을 결정적으로 찬탈한 일군의 젊은 발라드 싱어들의 이정표가 됐다"고 덧붙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