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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봄 수경사 사령관 장태완 사망 장군 소장 이등병 프로필 딸 장현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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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봄 수경사 사령관 장태완 사망 장군 소장 이등병 프로필 딸 장현리

457gh 2023. 11. 28. 18:25

장태완 전 국회의원 숙환으로 별세
- 2010. 7. 27

지난 26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 장태완 전 국회의원은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며 급박한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은 군인이었습니다.

장 전 의원은 1979년 12·12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신군부에 체포돼 고초를 겪고 결국 강제예편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 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다.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밝혔답니다.

1950년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한 그는 5군단 작전참모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71년 장군으로 승진한 뒤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사단장, 육군본부 교육참모 차장 등을 거쳐 79년 11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불과 한달 만에 12·12사태가 터졌고, 그는 보안사령부에 체포돼 서빙고분실에서 두달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가택연금 및 강제예편을 당해야 했답니다.

개인적인 비운도 겹쳤다. 12·12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 부친과 서울대 재학 중인 외동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와신상담한 그는 93년 당시 민주당 '12·12 쿠데타 진상조사위'를 통해 공개증언에 나서며 '진실 알리기'에 힘썼다. 12·12사태가 재조명되면서 '군인의 표상'으로 추앙된 그는 TV 정치드라마 < 제4공화국 > 을 통해 목숨을 던져 쿠데타를 진압한 모습이 소개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94년에는 자유경선으로 당선된 첫 재향군인회장이 됐다. 6년간 재향군인회를 이끈 그는 2000년 3월 민주당에 입당, 16대 총선을 통해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했다. 후에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약했고 2002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보훈특보를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아내 와이프 배우자) 이병호씨와 딸 현리씨, 사위 박용찬씨(인터젠 대표) 등이 있습니다.

'서울의봄' 정우성 맡은 장군의 끝…실제 일가족 풍비박산 났다
-2023. 11. 28

지난 22일 개봉한지 6일 만에 누적 관객 수 200만명 돌파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서울의봄’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과정을 시간 단위로 그렸다. ‘역사가 스포’라는 말이 있듯 관객 모두가 결말을 알고 보면서도, 신군부 전두광(전두환) 보안사령관 세력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이태신(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긴박한 9시간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졸이게 한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역사에서도 좀처럼 ‘스포’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태신 사령관의 끝이 어땠는지다. 실제 그는 역사에서 전두환 세력에 맞섰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티브로 했다. 김성수 감독은 극중 인물의 이름을 가명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캐릭터를 설정하는 데 있어 자유로워졌다”며 “이태신은 극중에선 ‘흔들림 없고, 지조 있는 선비’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장태완 사령관은 ‘불같은 성격’이었다”고 설명했답니다.

시사저널이 2006년 공개한 장태완 사령관의 ‘육필 수기’를 보면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일 자신을 회유하려던 유학성 군수차관보와의 통화에서 “여럿이 모여서 뭐하고 있는 것이냐”며 “야! 이 더럽고 추잡스런 놈아! 너는 끝까지 그따위 처신으로 군인 생활을 마칠 것인가?”라고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부었다. “내 전차를 몰고 가 네놈의 대가리부터 깔아뭉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12월 13일 오전 비전투병까지 소집해 준비한 출동은 참모들의 만류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영화 속 경복궁 앞 반란군과의 대치는 일어나지 않았다. 장태완 사령관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실패한 영웅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서빙고분실에서 45일간 고초를 겪고, 강제 예편됐다. 풀려난 후에도 6개월간 가택 연금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이런 사실을 비관해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 1980년 세상을 떠났다. 가택 연금 생활 중에도 공부를 열심히 해 서울대에 합격했던 장태완 사령관의 아들은 1982년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후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당시 장태완 사령관은 아들의 묘지에서 “우리 내외의 인생은 사랑하는 성호(아들)가 이 세상을 떠났던 1982년 1월 9일로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인생은 더부살이로서 우리 일가 3대를 망친 12·12사건을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현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인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장태완 사령관을 임명했을 때 그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용서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1993년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고 1996년 법정에서 두 사람을 향해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남겼다. 2000년엔 새천년민주당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이어갔습니다.

장태완 사령관의 저서로는『12·12 쿠데타와 나』가 있다. 그는 과거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987년 11월 화병으로 인해 받은 심근경색 수술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 가슴앓이 통증이 가끔씩 재발한다”며 “나처럼 12·12군사반란에 대해서 정말로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도 없을 거다. 죽기 전 군사반란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심근경색 수술 전 병실에서 일주일간 이 책을 바로 집필했다”고 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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